반응형
"다 늙어서 무슨!" 기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콧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 다 늙어서!" 옆에 앉은 나도 맥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사실 기정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누군가 옆사람으로부터 "내가 아는 친구가 이제 친구 그만 하자네"라는 말을 듣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유가 무언지 궁금해서 "왜? 무슨 일이 있었기에?"라고 물을 거라 예상된다. 그러나 기정의 반응은 의외였다. 사유를 듣고 "너무했네, 뭘 그렇게까지 그런데."라는 반응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다 늙어서 무슨!" 이란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비에 말을 이어갈 만한 상황도 되지 않았고 나도 딱히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
재경이 한동안 울린 전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언니 재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았다. 재경은 커튼으로 가려진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예고된 작별을 감지했다. 재서는 고모의 임종을 알리고, 자신의 남편이 퇴근하는 대로 내려가자는 말을 전했다. 전화기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건물 아래 배드민턴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배드민턴장에서 발로 공을 주고받던 홀쭉한 남자애가 친구에게 손을 흔들며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좇았었다. 배드민턴장 벤치 아래 축구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공이 찌그러져 보였다. 어젯밤 두 남자애들은 성치않은 공을 가지고 놀았던 모양이다. 쌀쌀한 공기가 콧속으..
'에덴의 동쪽' 주제는 ‘팀셀’ 최근 넷플릭스에서 '에덴의 동쪽' 7부작을 보았다. 제목이 낮익은데? 중간에 졸기도 했지만 재미있고 길이가 적당해서 더 좋다. 재미있는 사실은 극본을 쓴 조이카잔은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 에덴의 동쪽의 감독인 엘리아 카잔의 손녀딸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이카잔의 아버지 (즉, 엘리아 카잔의 아들) 니콜라스 카잔인데 이분의 영화필모도 놀랍다. 이들 놀라운 3대의 사람들은 나중에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 일단 이번에 본 7부작으로 돌아가자!'제임스 딘'이 출연했던 1955년 영화. 그걸 드라마로 만들었나? 존 스타인벡의 원작소설도 이름이 같은 터라 이번 작품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이 작품들은 그 뿌리는 같으며 조금은 다르다. 조금 들여다보니 그 차..
9월로 들어서자 달라진 새벽공기를 느끼려 창문들을 열었다. 쌀쌀해진 아침공기에 카디건을 찾아 입고 다용도실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커피를 갈았다. 은주는 자는 남편과 아이를 깨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차가워진 공기에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전해졌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커피를 들었지만 어떤 허들도 없는 것 같은 은주 자신의 일상 속 행복이 크게 느껴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려고 다가선 싱크대 앞에서 다용도실 문 앞의 달력을 살폈다. 9월에 메모된 다섯 개의 일정들 중에 가장 진하게 쓰인 '동기모임'을 보며 남아 있는 커피를 마시고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2시에 정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임에 대한 안내로는 2주나 앞선 다소 빠른 전송이었다. 우리의 본모습을 찾아! 9월 ..
작년 동창들과의 모임에 가던 날이었다. 예약된 병원 진료시간을 코앞에 두고 옷단장을 마친 은주의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병원진료가 떠올랐다. 바로 이틀 전 안내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은주는 다소 충격을 받아 멍한 채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후 허들을 뛰어넘을 태세를 갖추며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갑자기 아버지 간병이 필요하게 돼서요."라고 말하자 전화를 받은 병원의 여자는 놀란 탄성을 내지르며 힘내시라는 덕담까지 들려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인 것에 잠깐 죄책감이 들었다. 전화 속 그녀는 내게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맞닥뜨린 간병으로 이해하는 듯했다."얼마나 미루면 될까요?" 조심스레 묻는 그녀의 말투에 걱정 어린 진심이 묻어 나왔다." 네, 한 열흘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