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허들을 넘는 방법) 1

은주의 주방 다용도실 문엔 대형 달력이 걸려있다. 달력 위엔 검은색 긴 고무줄에 감긴 모나미 볼펜도 걸려있다. 날짜들 밑에 적힌 내용들은 매우 다양했다. 날짜 밑에는 집안 대소사며 아이의 어린이집 일정, 어머니의 병원 날짜, 세금과 카드값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별표를 치거나 두세 겹 진하게 덧칠한 모임 날짜도 있었다.

 

"부장님, 영월로 문상 가려고 조퇴하려는데요. 사촌 차편에 동행하려구요 " 처음 작정하고 한 거짓말은 직장 상사 강기혁 부장 앞에서였다. 부장은 돌아올 날만 묻더니, 어서 출발하라고 했다. 일이 마음 같지 않은 지 모니터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는 부장은 삼촌을 들먹일 여지를 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준비한 여러 가지 핑계들은 은주의 머릿속에서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필요하지 않았다. 삼촌이 오랫동안 심장이 좋지 않아 인공심장기기를 달고 사셨다거나, 영월까지 대중교통의 불편함이나 대방동 친척을 챙겨야 한다는 말은 은주의 머릿속에서 하룻밤을 살다 사라졌다.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올 때 계단 참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정 과장과 마주쳤지만 바쁜 몸짓과 목례만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근무 시간 중 담배 피우는 시간이 잦은 정 과장을 두고 부장과 사장이 나누는 험담이 떠올랐다. 1차 시안을 출력하여 의논을 하려던 은주가 정 과장을 찾았으나 두 번이나 자리를 비운 탓에 일이 꼬였던 날이었다. 정 과장은 부장에게 나의 조퇴 사유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 출신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떠벌리며 부장의 책상 앞에 서성거릴 것이다. 마땅치 않아 듣는 척할 부장의 얼굴이 하나의 그림으로 떠올랐다.

 

열두 살이 더 많은 과장은 상사인 부장을 자신의 막내 동생쯤으로 여겼다. 가끔은 누가 부장이고 누가 과장인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쑥닥거렸다. 정 과장이 반말로 훈수를 두는 일도 허다했다. 직급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정 과장이 사장에겐 골치 아픈 존재라는 동료의 말을 단번에 수긍한 은주였다. 정 과장이 사장의 먼 친척이니 그럴만했다. 정 과장이 가장 좋아하는 수다의 재료는 가족관계와 출신 배경이었다. 그는 재계의 혈연관계니 연예인의 집안 사정들 뿐 아니라 식당 영양사의 출신 배경까지도 알고 있는 별난 사람이었다. 정 과장이 어떤 말을 떠벌리며 부장의 책상 앞을 서성일 지 잠깐 걱정되었으나 이내 사라졌다.

 

이미 두시를 넘겼지만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 사람을 마주칠까 두리번거렸다. 큰길로 나와서야 은주의 마음은 자유로워졌다. 골목과 대로의 경계선에서 그녀는 변장용 고무얼굴을 벗어던지는 미션 임파서블의 배우를 떠올렸다. 며칠 전부터 고민한 미션을 아주 쉽게 해낸 것이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어깨가 들썩여졌다. 코끝으로 들어온 가을바람에 기분이 좋았었다. 해방감은 은주의 잠깐의 양심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날 은주는 오랜만에 시내 중심지를 돌고 커피를 마셨으며 한 없이 대로를 걸었었다. 오랜만에 혼자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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