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허들을 넘는 방법) 마지막편

 9월로 들어서자 달라진 새벽공기를 느끼려 창문들을 열었다. 쌀쌀해진 아침공기에 카디건을 찾아 입고 다용도실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커피를 갈았다. 은주는 자는 남편과 아이를 깨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차가워진 공기에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전해졌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커피를 들었지만 어떤 허들도 없는 것 같은 은주 자신의 일상 속 행복이 크게 느껴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려고 다가선 싱크대 앞에서 다용도실 문 앞의 달력을 살폈다. 9월에 메모된 다섯 개의 일정들 중에 가장 진하게 쓰인 '동기모임'을 보며 남아 있는 커피를 마시고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2시에 정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임에 대한 안내로는 2주나 앞선 다소 빠른 전송이었다.

 

우리의 본모습을 찾아! 9월 13일 토 12시 '부아쟁'

예약 필수- 인원파악 필수

참석여부를 9월 6일까지 알릴 것^^

 

 뒤이어, 한 번 더 카톡이 울렸다.

한강변을 내려다보는 레스토랑 내부사진과 멋진 플레이팅 접시들이 딸린 부아쟁 주소가 이어왔다.

 

 처음 그들이 만남 장소를 투표로 정하려고 했을 때 의견수렴은 쉽지 않았다. 이틀 뒤 투표 취소를 통보한 정화였다. 자신이 적당히 정할 테니 여건이 불가피한 사람은 빠져도 된다는 정화의 말에 다들 이견이 없었다. 기본회비 3만 원은 매달 이체를 하여 공금으로 모으고 당일 소요비용은 N분의 1로 하자는 정화의 일방적인 추진에 토를 단 사람도 없었다. 정화가 정한 장소들은 워낙에 고가의 식당들이라 은주는 또 하나의 허들을 만났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워커힐에서 공연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광화문 사거리 호텔에서는 서양인 웨이터가 따라주는 와인을 음미해 볼 수도 있었다. 즐거움과 뿌듯함이 은주의 허들을 허물어 내렸다.

 

 공유된 주소를 열어 부아쟁으로 들어갔다. 평점의 숫자 옆으로  '호텔나루 서울 레스토랑. 부아쟁. 프랑스 음식점' 십만 원 이상'이라는 요점 글자들이 보였다.

안경을 찾아 업체 측의 사진과 리뷰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사진 속 레스토랑은 통창으로 한강과 여의도를 볼 수 있는 멋진 식당이었다. 마포에 사는 영미가 가장 먼저 댓글로 환호했다. 잠원동에 사는 경숙도 뒤이어 가본 적이 있노라 반색했다. 혜경만이 'ㅇㅋ'라는 축약어로 말을 끝냈을 뿐, 나머지 친구들은 카톡으로 수다를 이어나갔다. 만나 이어질 이야기의 밑밥이었다. 얼마 전 유럽을 다녀온 옥순은 아직 시차에 적응이 덜 됐다고 했고 골프에 빠진 성자는 인증숏을 날려 멋진 각선미란 찬사를 받았다. 뉴욕에 아들과 함께 있는 소영은 참가가 어렵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어 경숙이 자신의 뉴욕의 여행 경험을 들먹였다.

은주는 핸드폰을 닫았다.

 

 은주는 마지막 안내, '호텔나루 서울 레스토랑. 부아쟁. 프랑스 음식점' 십만 원 이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일주일 뒤 빠져나가야 하는 카드값을 떠올리니 13만 원가량의 비용은 허들이 되었고 이내 불참을 마음먹었다. 일주일 뒤 참가가 어려운 정황엔 뭐가 적당할까 망설였다. 동창들 모임은 오래전 결정된 것이고, 이것을 뒤엎을 가까운 미래에 적합한 사유엔 무엇이 가능할까 은주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종일 은주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렸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다른 친구들의 수다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은주는 어떤 거짓말이 자신을 덜 난처하게 해 줄지 생각하느라 일요일 오후가 어이없이 지나가는것이 안타까웠다.

 

 오후 5시경, 저녁상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와 남편은 그녀를 놔두고 산책 나섰다.

"한 바퀴 돌아옵니다. 엄마 잘 다녀올게요!" 남편이 슬리퍼에 발을 넣으며 아기 목소리로 흉내를 냈다. 콩나물을 다듬던 중 전화가 짧게 울렸다.

손의 물기를 닦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검은색 리본과 흰 국화꽃 아래 부고안내가 보였다.

강기혁 부장이 세상을 등졌다는 내용이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그의 부고소식에 은주는 망연자실했고 가슴은 철렁했다.

 

 한 번도 은주의 거짓 핑계를 되묻지 않던 강 부장의 끄덕이는 고갯짓이 그림처럼 아른 거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은주의 타고난 기질을 이해해 준 사람이며 잘못된 음주습관들에 가림막을 쳐준 그가 더 이상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