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동창들과의 모임에 가던 날이었다. 예약된 병원 진료시간을 코앞에 두고 옷단장을 마친 은주의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병원진료가 떠올랐다. 바로 이틀 전 안내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은주는 다소 충격을 받아 멍한 채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후 허들을 뛰어넘을 태세를 갖추며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아버지 간병이 필요하게 돼서요."라고 말하자 전화를 받은 병원의 여자는 놀란 탄성을 내지르며 힘내시라는 덕담까지 들려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인 것에 잠깐 죄책감이 들었다. 전화 속 그녀는 내게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맞닥뜨린 간병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얼마나 미루면 될까요?" 조심스레 묻는 그녀의 말투에 걱정 어린 진심이 묻어 나왔다.
" 네, 한 열흘정도면 될 것 같아요." 은주도 속상한 저음의 말투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 네, 잠깐만요."라고 말한 전화기 속 여자가 잠시 일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 그럼 다다음주 17일, 금요일 어떠신가요? 이전처럼 오전 열시요."
그렇게 은주의 병원 예약은 쉽게 변경되었다. 이전 전화 예약 때 당일 변경은 좀 피해 달라는 당부안내가 은주의 거짓말 앞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은주는 진료일정을 까맣게 잊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약속한 자신을 의아해했다. 쇠퇴한 기억력에 잠깐 우울감을 느꼈으나 이내 허들을 성공적으로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출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10여 년 세월을 넘어선 동창회 소식은 단조로운 은주의 일상에 작은 파문을 가져왔다. 과대표 도영을 통한 긴 안내글은 2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회상에 힘입어 잠시 활기를 얻은 은주는 참가와 불참의 마음 사이에서 여러 날 갈등했다. 일주일을 앞두고 은주의 마음이 불참 쪽으로 기울었을 때 정화의 집요한 전화는 여러 번 왔었고 둘러댈 말을 준비할 수 없었던 은주는 동창회 참가를 결정했다. 정화는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과친구였다. 졸업을 한 후 결혼을 알리지 않은 정화로 인해 그 둘은 소식이 끊겼었고 은주의 어머니는 가끔 정화의 안부를 물었었다. 그들 모두는 서로의 변모를 살펴가며 덕담을 나누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 동기들 중 같은 건물에서 졸업작품 제작에 동고동락했던 조소와 회화파트의 친구 여덟 이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졸업작품 이야기에 꽃을 피우던 그들은 모두가 일시에 한 마음이 되는 기분을 느꼈고, 다음을 기약하며 모임이 결성되었다. 몇몇은 박수를 쳤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일정을 들먹일 때마다 은주에겐 마음속 허들이 늘어서는 것으로만 느꼈지만 내색할 자신이 없었다. 간신히 막차를 타고 귀가한 은주는 얼굴을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바로 이틀 후 단톡방을 개설하고 정식으로 모임을 추진한 것은 정화였다.
정화의 권유에 쫓겨 참가한 동창회는 드라마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같은 얘기를 하고 동시에 다른 마음으로 들어야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안정된 삶의 모습은 그녀들이 입고 가진 물건들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소음 속에서도 은주의 감각세포들은 제 기능을 다했고 은주는 잠시 외로움을 느꼈다. 친구들 모두가 강남이나 마포 등 도심지에 자리 잡은 것에 비하면 자신이 사는 별내는 너무 멀기만 해서 귀가할 생각에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각자의 여유를 자랑하기 바쁠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는 거짓말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잠시 후 정화의 기억력은 은주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정화가 소환한 대학 시절, 은주는 과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학생이었다. 은주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교수들의 칭찬으로 모두의 이목을 끌었고 유일하게 사대문 안에 살고 있는 여대생이었다. 작은 하숙집이나 자취방, 그리고 친척집 등에 살던 친구들은 남산타워가 보이는 필동 은주네 집에 자주 놀러와 여러 날 머물다가기도 했다. 정화의 기억 속에서 은주는 자신도 잊고 있었던 결혼 전 모든 것을 추억했다.
필동집 너른 마당, 자신의 동남향 방과 잘 가꾼 어머니의 화초나무들!

정화가 과거 이십 대 초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때 친구들은 하나같이 짧고 비슷한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그랬었나? 니가? 내가? 쟤가? 진짜?
모든 반응은 짧고 의아한 질문이었지만 오로지 은주의 집에 끼니를 신세 진 이야기나 은주의 베이지색 커튼이 달린 방 이야기에는 한결같이 "맞아!"라 응수하며 일제히 은주를 바라보았다. 은주의 미소와 함께 머릿속 작은 허들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함께 움직이자며 우기던 정화가 지긋이 은주를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정화의 기억력과 추진력에 허들을 넘었다고 생각한 은주는 며칠 후 창고의 달력을 찾아 다용도실 문 앞에 걸었다. 다음 모임 날짜에 진한고 굵은 동그라미를 친 후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찾은 긴 고무줄로 볼펜을 매달아 걸어 두었다. 남편은 은주의 기이한 취향에 놀라움을 보였지만 실용적이라 좋다며 자신도 일정을 적어 넣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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