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이 훌쩍 넘는 올해의 최고작 '블루탈리스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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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나? 싶은 엔딩부분이 혼란스럽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건축학교 이름만 사실일 뿐 실존했던 건축가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단지 당시의 건축사조와 유행들을 담은 영화는 틀림없습니다.
애드리안 브로디에게 걸맞는 영화(미국인이나 미국인 외모가 아닌 듯한-유태계 헝가리언으로 분함)로 이미 호평과 수상을 거머준 영화이며 이동진의 극찬이 따랐다고 합니다.
 

사진도 건축처럼

 
 영화가 3시간35분에 가까워 중간에 인터미션이 15분 있는 장시간의 영화지만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서사가 복잡하지 않고 인물의 감정변화가 크지도 않은 채로 이야기의 진행이 몇 십년에 걸쳐 소개됩니다. 독일의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능력있는 유태계 헝가리 출신의 건축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한줄 소감

영화를 본 전체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입니다.

다 지어지지 않아 거칠고 성근 구조물을 본 느낌이 있습니다. 왠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속 주인공이 지은 건축물-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가 떠오르는- 탓인 지, 건물이 있는 곳의 언덕의 모습이 늘 어두웠던 탓인지!
그런데 시작 부분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입국하는 부분의 영상과 음악은 매우 조화롭고 긴박하며  마지막 에필로그에 쓰이는 음악은 시대배경을 잘 나타내 훌쩍! 시간을 이동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나무위키

 
그리고 기억나는 대사, 라즐로가 자신에게 건축을 맡긴 부호에게 하는 말입니다. "정육면체를 가장 잘 알려면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문장이었는데도 기억이 아리송합니다.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면 긴 시간만큼 연극무대처럼 막과 장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지닙니다.
인터미션 자체, 처음 장면의 긴박함을 영화적 촬영기법으로 흔들리고 허물고한 도입부,  거꾸로 선 자유의 여시신상, 후반부의 시작초반 음영 등 아카데미 편집상은 확실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왜, 이영화가 이동진이 극찬햇으며 헐리웃이나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은 것인지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서사가 길어서? 주인공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도주하는 상황이 가슴절절한 시대 배경이라서? 전쟁으로 인한 시련과 가족의 해체가 주는 고통이 그렇게까지 그려지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후반부 장면(에필로그, 제 1회 건축 비엔날레-베니스 시상식 장면) 은 피를 절절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급히 성근 바늘로 봉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역경을 이겨내는 구조로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니구요. 그런데 또!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애드리안 브로디의 연기는 정말 우아하고 딱 그를 위한 역할인 것같습니다.
 


한 번 더 보고싶다는 이유가 뭘까? 종일 갸우뚱하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다시 생각해보니.
 
1. 소극장 화면에서 보았기에 이탈리아의 채석장이 있는 산이나 필라델피아의 풍광 그리고 그의 작품인 건축물 자체를 좀 작게 본 것이 아쉬운 탓인가?
2. 물주인 부호의 성취향과 성추행이 다소 갑작스러워 그간의 라즐로의 건축가적 고뇌와 열정이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기떄문인가?
3. 후반부 에필로그가 갑자기 시대가 바뀌며, 그가 결국엔 해냈다는 조카의 설명과 찬사에 정작 주인공인 라즐로가클로즈업되지도 않고 그냥 휠체어의 늙은이로만 바춰지기에 뭔가 인생 전체를 갈아넣어 이룩한 사람의 서사로 마감되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인가?
 



 
여하튼 아직도 갸웃하며 영화를 다시 복기해봅니다. 그런데 이영화속에 나오는 시대적 배경과 건축사조 등은 매우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애드리안 브로디가 연기한 라즐로)이 공부했다는 독일의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는 실제의 역사 속에 건재했었던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또한 영화의 배경이 되는1950년대 미국 사회가 그려지기에 당시의 미국사회를 몇 가지 키워드로 알아보았습니다. 당시의 미국은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특징

 
1. 소비문화의 확산
전후 경제 호황으로 소비문화가 급격히 발전했습니다.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자동차, 가전제품, 생활용품 등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러한 물건들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광고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소비문화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2,30년대 이미 4명의 핵가족이 주가 되는 가족형태를 가졌으며 주요 4대 가전과 자동차가 각 가정에 보급되었었다는 역사적 팩트에 놀란적이 있습니다. 1970~80년대 학창시절 가정환경조사서에는 티비를 가지고 있는 지 집전화가 있는 지를 조사하는 칸이 있었기에 매우 놀라 기억이 뚜렷합니다. 그러니 그 후로 2, 30년 뒤인 1950년대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로 지금의 서울과 비슷한 규모의 빌딩들이 늘어선 미국의 뉴욕을 볼 수 있었던 게 맞습니다.)
 
2. 냉전 체제
국제적으로는 군사력 증강과 동맹 강화를 통해 냉전 체제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냉전은 단순한 군사적 대립을 넘어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이념 갈등으로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 교외화 현상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교외로의 이주가 급증했습니다. 레빗타운과 같은 계획된 주택 단지가 등장해 중산층 가정을 위한 대규모의 저렴하고 규격화된 주택을 공급했습니다. 이는 핵가족 중심의 생활양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4. 사회의 동질화
소득 분배의 평등화로 인해 사회 계층 간 격차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생산량의 증가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공산품이 쏟아져내린 당시였기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소비 유형과 가치관이 비슷해지는 '동질화한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대기업의 출현, 대중 매체의 영향, 그리고 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이러한 동질화를 촉진했습니다. (계층간 격차가 당시엔 줄어들었다가 요즘 다시 벌어진 것이겠지요? 수퍼리치의 도래 이전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5. 순응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적 윤리에서 집단주의적 윤리로 전환되면서, 개인의 창조성보다는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이는 '타인 지향적' 인간형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경제적 풍요와 함께 새로운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 유럽에서 건너온 건축가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며 국제적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 영화속 배경처럼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우하우스의 영향

 
유럽,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 출신 건축가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모던 건축과 디자인을 국제적 양식으로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났습니다.
 
바우하우스 출신 주요 인물들의 활동
 
발터 그로피우스: 1937년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건축가공동체(TAC)'를 결성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1938년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학장으로 초빙되어 바우하우스의 교육 철학을 미국에 전파했습니다.
 
 

미국 건축계에 미친 영향

이 유럽 출신 건축가들은 미국의 풍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의 영향으로 미국은 1950년대까지 선두적인 디자인 국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국제적 스타일의 발전
유럽에서 발전한 '모던' 스타일이 미국을 거쳐 다시 유럽으로 역수입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이는 미국식 생활 방식과 함께 유럽의 문화와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건너온 건축가들은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국제적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설립된 혁신적인 디자인 학교로,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역사

 
설립과 발전
1919년 4월 12일,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바이마르에 설립되었습니다.
 
기존의 바이마르 예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통합하여 새로운 교육 철학을 도입했습니다.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삼아 새로운 시대 정신을 반영했습니다.
 
철학과 교육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을 강조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분야(회화, 조각, 금속 가공, 가구 디자인 등)를 가르치는 학제 간 접근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동과 폐교
1925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데사우로 이전.
 
1932년: 베를린으로 다시 이전.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폐교.
 

영향과 유산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기능주의와 모더니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과 교육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디자인 교육과 실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그 혁신적인 접근 방식과 철학은 현대 디자인과 건축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면 이해가 좀 더 될까요? 감독의 의도를 듣고 싶습니다. 안도다다오와 르꼬르 뷔지에가 떠오른 영화 불루탈리스트였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덜 몰입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드는 유튜브 영상을 공유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XOkLFAdJA

 
ps: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 작품상이나 편집상이 아닌 남우주연상(워낙 유력했으니까), 그리고 음악상(그럴만하다)이 블루탈리스트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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