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짝의 신발로 남은 사나이 (맨홀 아래) 4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그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재혼이 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엄마와의 결혼 이후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했다. 처음엔 강릉 큰고모 집에 머물며 언젠간 돌아올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보름도 안 되어,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큰고모는 내게 밥을 떠먹이던 아버지를 향해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다.

“아들의 행방도 모르면서 밥이 넘어가냐고!”

“누나, 나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어. 기혁이 내 새끼야.”

고모의 말을 듣던 아버지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 울분 속에는 깊은 절망과 회한이 섞여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아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고모들의 눈엔 아버지에 대한 측은함이 담겨 있었지만, 엄마의 등 뒤에선 그 눈빛이 적개심으로 바뀌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가족들로부터 한 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고모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고, 중학교에 들어선 뒤부터 고모들을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아버지 퇴직을 앞둔 어느 봄날, 세 고모가 불쑥 찾아왔다. 엄마와 나는 학원을 알아보려 외출 채비 중이었다. 외출을 미루게 하려는 고모들을 보며, 나는 엄마의 결혼과 그의 가출, 방황에 대한 반감이 들었고,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한 달 넘게 고모들의 전화가 이어졌고, 엄마와 아버지는 거의 말을 섞지 않으며 그 봄을 보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내 생활의 중심은 서울로 옮겨졌다. 엄마는 서울에 내 거처를 마련하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그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었다. 매일이 바빴고, 시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퇴직금 일부로 서울 거처를 마련하려는 엄마와 오빠 몫을 주장하는 고모들이 몇 달간 충돌했다. 아버지는 네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집 밖을 맴돌았고, 빠르게 늙어갔다. 시간이 많아진 아버지는 점점 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잠식되어 갔다.  한때는 눈먼 사랑으로 남의 삶을 흔들었던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를 원망하며 멀어졌고, 그에 따라 아버지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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