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105동 동대표가 1505호 윤희에게 인터폰을 넣어 단지 대표의 집과 호수를 알려주며 건너와달라고 제안을 했다. 단지 대표가 반색을 하며 윤희가 앉을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윤희는 적막하게 둘러앉은 네 사람의 모습에 크게 긴장하여 두리번거렸다. 105동 동대표가 주방에서 차 한 잔을 내오자 단지 대표가 말을 시작했다.
“자, 이제 다 아는 사람이고 내가 오시라 했으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1505호, 영어를 잘한다면서요?”
그녀가 윤희의 손을 다급하게 잡으며 물었다.
“우리가 다 같이 백인 남자를 찾아갈 건데, 윤희 씨가 다리 역할을 좀 해줘야겠어. 다짜고짜 뱀을 없애라거나 나가라고 할 순 없으니, 사실 확인부터 정확하게 하고…… 그것 말고 다른 제안도 좀 건네보려고 하니까.”
“다른 제안이요……?” 통장여자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 윤희가 얼떨떨하게 물었지만, 단지 대표는 대답 대신 얼마나 놀랐냐며 위로를 했다.
“소장님한테만 말씀드렸고 아직 공론화 단계는 아닌데. 우리 단지에도 건너편 입주 단지처럼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원어민 영어교실을 개설해서 운영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싶거든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외국인 남자가 적격이지, 한양대 교수라는 사람이 주민이자 영어교실을 운영한다면 우리 단지의 이미지가 얼마나 좋겠어요? 1505호도 영어를 잘하면 원어민 관리며 영어교실 운영을 도울 수도 있고. 그걸 타진하려던 참이었거든.”
퇴직 후 좋았던 일이 년이 지난 후 조금 무료해지던 중이었다. 윤희의 귀가 솔깃했지만 통장 여자의 눈길이 따가웠다.
“지금 뱀 때문에 모인 거 아니었어요?” 통장 여자가 볼멘소리로 소장과 단지대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통장님, 겸사겸사 인 거죠. 뱀도 알아보고 영어교실도 알아보고, 그걸 중간에 1505호, 맞죠? 1505호.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고윤희예요.” 두 사람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느낀 윤희가 눈길을 피하며 제 이름을 말했다.
다음 날 소장과 단지 대표는 칼에게 인터폰을 넣어 그가 받자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가 집에 있음을 확인한 후 윤희와 동대표를 1305호 앞으로 불렀다. 단단한 현관문 앞에 다섯 사람이 서자 복도가 비좁았다. 관리소장이 여자 넷을 뒤로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 하는 소리가 작게 철문 밖으로 울려 나왔다. 잠깐의 정적 끝에 안쪽에서 중간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영어 소리가 들렸고, 이내 문이 열렸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민머리의 백인 남자, 칼(Karl)이었다. 그는 편안한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고, 갑작스러운 이웃들의 방문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Oh,”라고 소리 낸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다음 잠깐의 정적 뒤에 나머지 말을 했다.
“Hello?”
칼의 시선이 관리소장과 통장, 단지 대표를 훑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윤희에게 옮아갔다. 마침내 그가 반가운 기색을 띠며 윤희에게 미소를 지었다.
“Hi! 1505?” 호수를 천천히 숫자로 말하자, 윤희에게 가는 살가운 시선을 곁눈질한 여자들이 그의 파란 눈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윤희는 어설프게 목례와 하이를 동시에 건넸지만, 통장 여자는 벌써부터 칼의 등 뒤로 보이는 집 안 어딘가를 쏘아보느라 모두의 뒤에서 얼굴이 하얗게 굳어있었다. 마치 어디선가 노랗고 파란 뱀이 스르륵 기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잔뜩 사리다가 앞으로 한 발을 떼며 윤희의 허리를 찔렀다.
“아니! 뱀부터!” 방화문에 바싹 몸을 기댄 통장이 매우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단지 대표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윤희의 등을 토닥였다. “윤희 씨, 차분하게. 먼저 인사, 그리고 자연스럽게 물어봐요.”
윤희는 혀끝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외웠던 문장들은 머릿속에서 엉켜 들쑥날쑥 떠올랐다.
그녀는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Hello, Mr. Karl… We are… neighbors, apartment manager, and… residents' representative.”
칼은 So What?이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come in과 함께 손짓을 했다.
“No, No” 뒤쪽에 서 있던 통장 여자가 황급히 대답을 대신했다.
윤희는 내내 말을 풀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Well… there is a rumor… I mean, Hum! I’ve heard from neighbors.”
윤희의 등줄기에 땀이 솟았다. “Do you…have a snake as a pet in your home?”
드디어 윤희의 입에서 ‘Snake’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복도에 있던 통장과 동대표, 관리소장까지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순간 윤희는 적막 속에서 그의 파란 눈이 매우 흥미롭게 커지는 것을 보았다. 칼이 서양인 특유의 과한 입매를 만들며 뭔가 이해한 내색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Haha! Snake? A snake in my apartment?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의 입이 더 커졌다.
”Yes. snake! “ 통장여자가 뒤쪽에서 소리를 질렀다. 소장과 단지 대표, 그리고 동대표 여자가 통장 여자의 영어 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적막한 긴장이 사라졌다.
”She is so afraid of the snake! “ 윤희가 통장 여자를 보고 바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No, no, no!”
남자의 단호하고도 유쾌한 부정에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통장 여자에게로 쏠렸다. 통장 여자는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며 윤희에게 따졌다.
“아니, 아니라고? 내 친구 딸이 비어 할래에서 분명히 들었다는데! 알록달록한 색이 예쁘고, 촉감이 시원하다느니 하는 거! 그걸 말해봐요”
윤희가 당황해하며 칼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Uh… but someone said you talked about… bright colors, cool touch, and keeping it at home… at the pub?”
칼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혼잣말로 pub?을 웅얼거리며 멀뚱히 윤희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엄지와 검지를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소장과 단지대표 그리고 105동 대표는 양쪽을 번갈아가며 귀를 쫑긋 세웠다.
“Ah! The pub! With my students!”
웃음을 멈추지 않은 그가 연신 “Wait, wait!”을 외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통장 여자는 문이 열린 틈을 타 뱀이 기어 나올까 봐 뒤로 주춤거렸지만, 분명 아니라고 한 말을 들어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 칼이 들고 나온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고급 ‘도자기 파이프(Ceramic Pipe)’와, 파란색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다양한 색상의 ‘희귀 다육식물(Succulents)’ 그리고 뱀 형상이 조각된 유리 공예품이었다.
“Not a snake! It was Snake Plant—Sansevieria! And my ceramic collection!” 칼이 어설픈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I love succulents! Cold texture, beautiful colors! And this glass snake ornament!”
칼이 들고 있는 물건들을 본 사람들은 뱀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했으며 칼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복도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관리소장은 허탈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105동 대표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때, 단지 대표의 눈빛이 번뜩였다. 뱀 소동이 완벽한 오해로 끝나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까 주민센터 다락에서 구상했던 ‘더 큰 그림’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윤희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윤희와 칼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윤희 씨! 이제 진짜 본론을 얘기해 봐요.”
“네? 본론이요?”
단지 대표는 칼을 향해 특유의 비장하고도 친근한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윤희에게 속삭였다.
“내 소개부터 다시 해줘요. 그리고 내가 제안하는 거라고. 우리 아파트 단지 커뮤니티에서 영어교실이나 회화 클럽을 열어볼 생각이 없냐고.”
윤희는 긴장이 풀리며 제안을 다음으로 미루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뭔가 해결을 했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 1505호가 아닌 고윤희란 본인의 이름에 하나의 별호가 덧붙여질 것을 생각하니 기대감이 벅차게 차올랐다.
윤희는 혀끝을 정성스럽게 말아 쥐며, 이번에는 한결 부드러운 발음으로 첫 문장을 건넸다.
“Mr. Karl, Do you have some time to teach for some kids? We have a great offer for you.”
모두가 적막 속에 그의 입에 눈을 모았다.
통장 여자가 뒤에서 입꼬리는 내렸지만 볼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귀를 세우고 목을 길게 뺐다.
“그럼, 전 이만 내려갑니다.”
소장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칼의 입을 바라보는 여자들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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