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소문만 듣고 혼자 조용히 영화관을 찾았다. 정말 잘한 일이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라도 한국 독립영화 산업에 작은 보탬을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칭찬한다.
세기의 주인? 세계의 주인? 헛갈렸다. 이름이 거창한 만큼 뭔가 있기를 고대하는데, 매불쇼에서 극찬을 하기에 주저없이 나서보았다.
이 영화는 최근 본 한국영화 중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들이 거의 새 인물들이다 장혜진과 김석훈을 제외하면!

며칠 전 본, 프랑켄슈타인이 다소 거북한 장치들과 감독이 의도한 장치와 색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해석하며 봐야 하는 작품이라면, 이 영화는 해석없이 전해오는 우리말과 정서를 담아 주변과 이웃,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시 둘러보게 만드는 진짜 ‘좋은 영화’다. 모든 장면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영화 내내 딴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익숙한 얼굴들 때문에 몰입이 깨지는 것도 없고, 대사와 장면들은 귀에 바로 박히면서도 뻔하지 않다. 마치 그들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 참 잘 만들었다.
첫장면 키스씬이 다소 놀랍고 길다.
자 슬슬 명랑하기 그지 없는 고등학생 주인의 교실과 집이 보여진다.
초반부 주인의 어머니가 일하시는 어린이집의 선생이 무심코하는 말"결핍이 있는 아이는 어떻게든 표가 난다"는 말이 들어오고 불안하다. (결국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 생각도 주의해야함을 알려준다. 이 대사가 결국 주인의 서명 거부와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된다.)
성폭력이란 어려운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낸 감독이 있었던가?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선악의 구도를 짜 놓은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과하지 않게 다양한 입장과 생각들을 한데 모아 치밀하게 짜낸 영화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평범한 고등학교 교실, 그들이 사는 집, 주변 풍경을 일상어로 그리면서도 단 한 순간도 ‘뻔한 대사’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 이런 방식의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중·후반부, 자동세차장에 들어서는 모녀의 뒷모습에서 나 역시 감정이 북받쳤다. 엄마를 향해 원망과 아픔을 쏟아내는 주인(서수빈—연기 초짜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하루하루 버티느라 그 고통 (친족간 성폭력) 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고통때문에 괴로운 엄마(장혜진), -아이들과 세상은 엄마에게, 자신말고도 엄마라는 이름의 완벽을 요구한다-에게 비눗물과 세차 솔이 앞창을 덮는 순간, 그 갇힌 공간의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뒷모습만으로도 감정을 오롯이 다 전달하는 다르덴 형제감독들의 아들이 생각난다.
오열하는 동안 말없이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가 딸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는 엄마 장혜진.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한바퀴 더 돌까? 울음을 털어내고 아무일도 없는 듯(어린 아들이자 주인의 남동생을 위해),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어리기만 한 것 같은 동생도 그들의 고통을 눈치채고 있고 그래서 애쓰는 모습도 참 뭉쿨하다(이 어린 남자아이 역의 배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앞으로의 연기가 기대된다. 소년의 시간?만큼 기대해보면 어떨까?)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제 일상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고 그만큼의 비중을 가지고 영화속에 들어서 있다. 성폭력이라는 소재를 포함해 인생의 고통과 그에 맞서는 태도, 받아들이는 방식이 특별하게 묘사되지도 않는다. 감독은 ‘누구나 그런 고통 하나쯤 안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시선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어린이집(혹은 유치원)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같은 반 친구 장수호와 갈등을 빚게 되는 계기, 또 그의 나이 차 많은 여동생 장누리와의 꼬집는 장면을 CCTV로 확인하는 엄마(장혜진)의 긴장감, 봉사활동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상처들은 이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히며, 세심하고 촘촘한 구성력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 쪽지글의 나레이션은 이 영화의 백미다. 편지글 낭독을 여러 다른 남녀 목소리로 담았다.
누구의 아니디어일까? 감독인가? 이 장면에서 과거의 고통(영화속에서 그런 대사도 나온다. 당시 난 그게 뭔지도 몰랐어)은 각기 다른 남녀의 목소리로 읽히면서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 어떤 고통스런 일들을 겪고 산다고, 너만 그렇지 않다고 위로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주인이 계속 주인공으로 나오면서도 각 인물들이 주인공만큼의 비율로 자리하는 영화! 주인의 세계이자 모든 인물들이 주인이 되는 느낌도 준다.
참 셀수 없이 수많은 층? 여러겹의 특별한 빵같은 느낌이랄까? 굳이 좋다고 짜내는 중이다. ㅎㅎㅎ
슬픈 노래를 합창하며 가사가 전달하는 고통의 기억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메로디에 취하여 위로받는 느낌!이 남는다.
주인이 서명할 수 없다고 같은 반 수호에게 대들 때 한 말이 이 영화를 관통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평생 그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분법적인 외부의 판단과 시선을 거부하는 것!"
진짜 잘 만들었다.
윤가은 감독 영화라면 이제 무조곤 봐야겠다.
출연진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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