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900- 클림트에서 에곤쉴레 (오스트리아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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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국립중앙박물관 포스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엔곤쉴레의 얼굴에 그의 이름이 아닌 비엔나 1900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영민한 주최자 측의 작명입니다. 비엔나 즉 오스트리아의 1900년대가 가별하기때문입니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의 위치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서 유럽에서 상당한 세력과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 영토 규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621,538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진 거대한 국가로,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 제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 인구: 인구 규모 면에서도 러시아와 독일 제국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3.경제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강대국이었습니다. 특히, 세계 4위의 기계공학 대국, 세계 3위의 가전제품, 전기공학, 발전기 제조 및 수출국이었다고 합니다.

 

4. 정치적 영향력: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으며, 국제 정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5. 문화적 중심지: 특히 비엔나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제국 내부의 민족 갈등과 구조적 위기로 인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00년대 초 헝가리와의 예산 분배 및 군대 언어 문제 등으로 내부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해체로 이어졌습니다

 

최근에 유럽에서의 입지가 매우 줄어든 오스트리아는 인구도 10001000만 명이 되지 않는다는군요. 작년, 스위스에서 만난 전 세계를 여행한 중년여성은 오스트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여행지였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참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여행의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1900년대의 찬란한 오스트리아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과 창조성이 꽃피운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술의 실험실

비엔나는 새로운 사상과 개념의 실험실 역할을 했습니다. 미술, 건축, 음악, 철학, 문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럽 전위파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2. 카페 문화

(카페 문화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엔나의 독특한 카페 문화는 예술가들의 교류와 새로운 아이디어 탄생의 장이 되었습니다. 1900년 비엔나에는 약 600개의 카페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서로의 사고와 정체성을 확장시켰습니다.

 

3. 다양한 예술 장르의 융합

이 시기 비엔나에서는 미술, 음악, 디자인, 건축 등 다방면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회화,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 드로잉, 사진, 가구, 공예품 등 다양한 장르가 융합되어 새로운 예술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4. 모더니즘의 태동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예술 틀을 깨고 혁신적인 표현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5. 비엔나 분리파와 디자인 공방

1897년 창립된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예술 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통해 예술가들은 다양한 장르를 통합하고자 하는 철학을 실현했습니다.

 

6. 국제적 영향

비엔나의 예술가들은 오스트리아 밖의 예술 운동을 경험하고 그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비엔나는 유럽의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이처럼 1900년대 비엔나는 예술적 실험과 혁신, 다양한 분야의 융합,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열리는 에곤쉴레전의 작명은 이해서 뛰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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